처음부터 유자차를 담글 작정은 아니었는데... 처남이 한동안 거제도에서 지냈어요. 어느 날 와서는 하는 말이 시장에 유기농 유자가 나왔는데, 생긴 게 못 생기고 크기도 들쭉날쭉하고 그래서 사람들이 잘 안 산다는 겁니다. 가게 주인이 덤으로 준다고 하는 걸 안 받아 가더래요. 못 생겼다고. 이야기를 들어보니 어디 한의원 하는 집에 유자밭이 있다는데, 거기거 유기농으로 키운 걸 팔 데가 마땅치 않으니까 동네 시장 과일가게에 부탁해서 파는 거라지요. 참, 아직도 유기농 과일을 외면하는 사람이 있다니 놀랍더라면서 얘기를 했어요. 솔직히 겨울에 유자차만큼 달고 맛있고 따끈한 게 없는데(제대로 담근 거라면 모과도 좋지. 흠) 유자는 껍질째 먹잖아요. 농약친 것은 먹기 싫은 덕분에 머릿속에 쓸데없이 아는 게 생기고는..
지난 목요일. 11월 26일이 봄이 첫 돌이었어. 아내는 며칠 전부터 진주에 나가 양단을 끊어 와서 아이 돌옷을 지었네. 고등학교 때 바느질하고 칭찬받았다는 경험만으로 덜컥 옷을 짓기 시작한 아내는 그렇게 몇날 며칠 꼼지락꼼지락 바늘을 놀려 옷을 지었지. 고운 양단을 끊어 온 사연 또한 한 타래가 될 만큼 이야기가 많은 것이었으나, 그 얘기는 그저 우리가 천 삯으로 이곳 감을 보냈다는 것으로만 넘기기로 하고, 돌 상을 차리는 것 또한 여기저기 말을 듣고, 주섬주섬 섬겨서는 힘 자라는 만큼 마련했네. 상을 마련하고 부부는 서로 마음에 들어서 이만하면 정성 들인 만큼 아이 돌 상으로 모자라지도 넘치지도 않는다고 생각했지. 옷을 짓고, 상을 마련하고 그렇게 돌 날을 하루 앞둔 저녁이 되니, 지난 한 해 동안 ..
면사무소 앞에는 슈퍼마켓이 하나 있습니다. 서울이라면 그저 동네마다 있는 마트 정도이지만, 이곳에서는 면에서 가장 큰 가게이지요. 가게에 통 가는 일이 없는 할매 할배를 빼고는 어지간한 면 사람들은 다 드나든다고 할 수 있습니다. 타작이 한달쯤 남았을 때, 가게에 들렀더니 주인 아주머니가 걱정스러운 듯 묻습니다. '나락 잘 됐나?' 그때만 해도 과연 올해 타작을 할 수나 있을지 걱정스러운 상태였습니다. 농약 안 친거야 우렁이가 대신 해 줘서 그럭저럭 풀은 없었지만, 비료 안 하고, 그나마 유기농 자재라고 사다가 넣은 퇴비나 효소 따위는 타이밍 놓쳐, 양은 모잘라, 성분은 신경 안 써. 게다가 물대기도 엉망이었지요. 덕분에 타작할 때가 되어가는데도 나락 사이로 골이 훤히 드러나서 논바닥이 보입니다. 남들 ..
도시에 살다가 시골에 가면 집. 집에 아주 큰 공을 들인다. 다 늙어 정년을 맞아 내려가는 사람도, 뭔가 큰 뜻을 품은 사람도, 그저 그냥 나같은 사람도. 아정의 작은 집 트로젝트를 보면서 이런 생각이 조금 바뀐다. 도시에 살면 정말 집에 대해서 아무런 공을 들이지 않는구나. 먹는 것에 대해서 손끝하나 까딱하지 않듯이 집에 대해서도 그렇다. 그러니까 여지껏 내가 거꾸로 생각하고 있었던 셈이다. 나도 집에 공을 들인다. 늘 마음을 쓴다. 작년 가을 잠깐 공사를 벌인 경험만으로 비추어 보건대, 아정의 지금 상황은 재난 수준이다. 다행히 마음을 모아 돕는 사람이 있고, 스스로 재난이라 여기지 않고 즐기고 있다. 대단한 힘이다. 추위를 버티는 일이 남았다. 안 그래도 겨울마다 내려올 궁리였는데, 지냈던 겨울 가..
밀가루 파동이 벌써 몇 주 전 이야기다. 낮에는 따뜻해도, 밤에는 제법 추워서, 잘때는 길고 따뜻한 옷을 꺼내 입는다. 벼에 이삭도 고개를 숙인다. 올해 농사는 작년에 견주면 아주 형편없다. 아마 쌀은 그저 먹을 것 정도가 나올 것이다. 어떤 일은 때를 놓쳤고, 어떤 일은 제대로 하지 못 했다. 이제 추수까지 한 달쯤 남았는데, 아직 고개를 숙이지 않은 이삭이 많다. 그것들은 아마 추수하기 어려울 것이라고 한다. 적당한 때에 적당한 일을 하지 않으면 어떻게 되는지, 똑똑히 본다. 다행히 굶지는 않을테니까. 잘못한 일이 많아서 그만큼 배우는 게 많다. 밀은 받지 못한 사람도 없는 듯하고, 우리도 아주 맛있게 먹고 있다. 그리고, 어제 밀가루가 돌아왔다. 뜻밖의 상자. 린처 토르테와 화이트초콜렛쿠키. 정성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