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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머와 아름다움

벼 직파

haeum_se 2010. 10. 20. 11:59

전광진씨. 바쁘지요? 내 바쁜 거 다 아는데, 오늘은 다 치우고 고마 오소. 꼭 오소.

아침 8시쯤 농업기술센타 공무원한테서 전화가 왔습니다. 언제가 되었든, 이 공무원 아저씨에 대해서도 한번 글을 써야 할 텐데요. 농사 공무원이 다 이 아저씨만 같으면, 우리 농업이 이꼴이 났을리가 없지요. 여하튼 전화를 걸어오신건 거의 처음이 아닌가 싶습니다. 통화를 한 것도 1년만? 오후에 두 시간.이라고 하셨으니 두말않고 가겠다고 했습니다.

오후에 시연을 한다고 한 것은 [생분해필름을 이용한 볍씨 무논 멀칭 직파] 시범이었습니다. 모내기를 하는 것이 아니고, 물댄 논에 볍씨를 직접 뿌리는데, 그걸 스스로 썩는 비닐로 덮으면서 점파를 한다는 것이었지요.  뭐 여하튼 모내기 안 하고, 일 줄어든다니까, 잡초 걱정 안 한다니까, 말만 같으면 당장 해야지요.


시간에 맞춰서 도착했는데도, 이미 기계와 장비에 대한 설명은 거의 끝나가고 있었습니다. 쉰 넘은 아저씨들, 일흔 넘고, 여든 넘은 할배들도 더러 계셨습니다. (저는 곧바로 기자 취급입니다. 40대로 보이는 사람도 없었거든요.) 
확성기를 들고 설명을 하던 분(아마도 영업사원쯤이랄까요?)이 
'자, 여기까지 간단히 설명드렸구요. 혹시 질문하실 거 있으시면 말씀해 주세요.'라고 하더군요.
이제 곧바로 시연을 하나 보다. 했지요. 설명 끝나고 질문 하라잖아요. 이 타이밍에 뭐 질문 한 적 있으신 분?

하지만, 그게 아니었어요. 회사측에서 가지고 나온 안내 팜플렛이며, 물건 따위를 꼼꼼히 들여다 보시면 아저씨들,말문을 엽니다. 이런 거 만드느라 수고하셨다. 따위 인사치레도 없고, 곧바로 핵심으로 들어갑니다.
아, 이런 게 정공법이구나. 싶습니다.
행사장은 사방이 트인 논 한 가운데를 가로지르는 길바닥입니다. 사람들은 그저 길 위에 둘러서 있구요. 헌데 소란스럽지도 않고, 또 그렇다고 한 사람만 얘기하는 것도 아닙니다. 이야기는 쭉쭉 이어지면서 설전이 오가는데, 여기저기서 한 사람씩 곧바로 다음 말을 받아서 이야기를 해 나갑니다.


( - 이 표시는 장비 설명하는 사람 이야기이고, = 이 표시는 농민 이야기입니다. 장비 설명하는 것도 서넛이 돌아가면서 합니다.)

= 잡초가 안 난다 했는데, 여기 구멍으로 풀이 날 수밖에 없지 않소? (비닐 멀칭에는 일정한 간격으로 동그란 구멍이 뚫려 있습니다. 구멍은 반원 두개로 나뉘어 있고, 가운데 쯤에 볍씨 두세개를 붙여 놓았어요. 비닐을 논바닥에 깔면 자연스레 볍씨에서 싹이 나서 구멍으로 자라는 것이지요. 구멍은 보통 귤만한 크기입니다. 그러니 그 구멍 사이로 잡초가 나지 않겠냐 하는 얘기였어요.)

- 아니요, 안 납니다. 그게 왜 안 나는지는 아직 잘 모르겠는데요, 작년에 저희가 해 봤을 때, 여러 군데서 해 봤는데 안 났습니다. 여기 사진에도 보시면 아시겠지만, 잡초가 없어요. 

= 구멍이 이리 큰데, 풀이 안 날리가 있나.

- 구멍에서 잡초가 안 나는 거는, 벼가 싹이 나서 아주 금세 자랍니다. 잡초보다 일찍 올라와요. 그래서 잡초가 올라오기 전에 벼가 자리를 잡습니다. 

= 구멍에서 잡초 안 나는 거는 그렇다 쳐도, 여기 골에서는 잡초가 나지.(골이란 비닐과 비닐 사이에 흙이 드러난 부분입니다.) 이거 사진 보면 잡초가 하나도 없이 깨끗한데, 사진에 왜 잡초가 없어? 이 사진 이거 문제가 있다고. 믿을 게 아니야. 당신 말대로 구멍에서는 안 날 수 있어도, 골에서는 반드시 나야지. 
 
- 거는 그렇지만, 이거, 사진 좀 보세요. 이거 출수하고 스무여드레 지난 건데, 벼가 부챗살처럼 쫙 퍼져가 자란다 아입니까. 이게 뿌리가 활착이 좋고, 튼튼하게 자란다는 이야기지요. 구멍 뚫어가 멀칭하는 거니까 어쩌다 가끔, 아주 가끔 구멍만 있고 볍씨가 없으면, 피가 납니다. 그거 손으로 못 뽑아요. 이게 피도 자라기 엄청 좋거든요. 뿌리도 아주 쫙 퍼져가 넓게 자라고. 멀칭을 해 주니까 온도가 3도에서 많게는 6도까지 더 올라갑니다. 싹 나서 뿌리 뻗고 자라기에 아주 좋아요. 아까 누가 도복 걱정하셨는데, 그거는 뭐 절대로 걱정안 하셔도 됩니다. 그냥 직파를 해도 뿌리가 좋은데, 이거는 그거보다 더 좋아요. 

= 비닐로 덮을라믄, (논을) 정리해가지고 네모 반듯한데나 쓰지. 경지 정리 안 되가 있는 논에서는 필름이 겹치면 구멍이 막히잖아?

- 네. 그게 이앙기 쓰듯이 하면 됩니다.

= 아니, 이앙기 쓰듯이 해도, 겹친다고. 이앙기 쓸 때는 겹쳐서 너무 많이 꽂으면 빼내면 되지만, 이거는 세모난 땅에서는 자투리가 남는 거 아닌가. 안 그러면 이게 겹치면 구멍이 막히지.

- 직파를 한 벼뿌리는 아주 예리하고 힘이 좋아요. 필름 뚫을 수도 있습니다. 거름살이 좋고 그러면 필름 뚫을 수도 있을 겁니다. 이거는 제가 실험 해 볼게요. 그리고, 당장에는 그렇게 남는데는 볍씨 뿌리면 됩니다. 상관 없어요.

밭농사 멀칭할 때는, 네모 반듯하게 멀칭하고, 나머지 짜투리 땅이야 뭐, 남아도 상관없지만, 논은 그렇지 않다. 이 질문은 아주 여러 사람이 했다. 모내기철에 이앙기로 모내기 하고 나서 다들 하루 이틀씩 논에 들어가 뜬모도 꽂고, 빈 곳을 메꾸는데, '논'이라는 이름 붙이고, 물이 들어있는 땅에는 한뼘도 비우지 않는 것이 몸에 밴 사람들에게는 너무나 자연스런 질문이었던 것.

= 이게, 얼마? 마지기에 18만원? 아니, 그럼 이렇게 좋은 거 처음에 몇 해 싸게 했다가, 농민들이 다 쓰겠다고 그러면 그때 값 올릴라고?

- 아이고, 어르신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요즘 그랬다가 회사 문 닫을라고요. 그런 일 없습니다.

= 이거, 특허 있다믄서?

- 네.

= 특허 있다는기, 농민들 좋은 일 할라고 하믄, 그냥 특허 같은거 없이, 저렴하게 누구나 할 수 있게 해야지. 특허 같은 거 해 가지고 혼자 잘 먹고 잘 살라고 하는 거 아녀. 독점이잖아 독점. 나중에 맘대로 값 올리고.

- 아닙니다. 아니에요. 18만원이면, 개발비하고, 해서 적당합니다. 몇해 지나서 값 올리고 안 그럽니다.

= 18만원도 비싸지. 기계값도 100만원이 넘는다믄서?

- 아, 그래도 저희가 이거 개발하는데에 130억이 넘게 들었거든요. 요즘 농약 안 듣는 슈퍼 잡초도 나오고, 왕우렁이는 정부에서 생태계 교란종으로 지정해 가지고 줄이려고 하잖습니까. 2014년까지 제초제 사용량을 30-40% 줄이는게 정부시책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큰 돈 들여서 저희가 이번에 개발한 겁니다.

= 그거야, 국고 보조 받아가지고 한 거잖아.  그거를 농민한테 와서 받겠다고 하면 안 돼지. 

그러고도 한참 질문과 답변이 오갔습니다. 특히 기술적으로 일어날 수 있는 문제에 대한 이야기가 많았습니다. 그러고는 시연에 들어갔습니다. 날이 이제 쌀쌀한데, 벼 타작한 논에 물 대 놓고 시범을 보입니다. 회사 사람들도 쫌 다르다 싶은 것이, 무논에 들어가야 하는 상황이 되니까, 곧바로 사장이라는 사람(파란 잠바)이 양말 벗고 들어가더군요. 발 시릴 텐데...


앞에는 중고 이앙기이고, 뒤에 달아놓은 장비가 이번에 만든 것입니다. 이앙기가 앞에서 끌고 가면, 뒤에 매달린 롤이 구르면서 커다랗고 시꺼먼 비닐로 논바닥을 덮어가는 것이지요. 
아직 기계도 엉성하고, 시연을 하는 회사 사람들도 준비가 매끄럽지는 않았습니다. 논바닥에 들어가서 한참을 끙끙댑니다.

= 저거, 저래갖고 물건 팔겠어?

= 아, 참. 사활이 걸렸을 낀데. 저거(이앙기) 쫌 좋은 걸로 가 오지. 



겨우겨우 시연을 시작합니다. 기계가 굴러가니, 또 곧바로 아저씨들이 한 마디씩 합니다.

= 골 내는 바퀴(양쪽 수레바퀴 비슷한 것)가 너무 작잖아. 여기 논이 진 논도 아닌데, 더 질면 바퀴 자국도 안 남아.

= 바퀴 갈아. 더 큼직한 걸로 해야 해. 그래야 골이 난다고. 

= 비닐 폭이 더 넓어야겠네. 비닐을 바퀴가 눌러줘야지. 

사장이란 사람은 조금 가다 말고, 무슨 얘기인가 하나씩 챙겨듣느라 정신이 없습니다. 옆에 서 있던 영업사원은 연신 말씀하신대로 고치겠다는 이야기를 합니다. 

- 네, 바퀴는 큰 걸로 바꾸겠습니다. 비닐은 안 그래도 지금 175cm인데요. 185cm로 바꿀겁니다. 

= 저거저거, 뱀 기어갔나. 운전하는 기, 기계 만든 사람이라고? 고칠 줄만 알재, 몰 줄은 모리네.

= 고만고만, 내리라고 해. 내려. 내려.

= 이거 비닐 걷고, 다시 해. 다시.

기계를 운전하는 사람은 공장장이라고 했는데요. 결국 내려야 했습니다. 비닐이 논바닥에 구불구불 기어갔거든요. 비닐을 싹 걷어버리고는, 보러 오신 아저씨 한 사람이 기계에 올라탑니다. 



공장장이며, 기술자며 옆에서 거들기나 하고, 시운전은 농민 아저씨가 합니다. 논바닥을 따라 비닐이 똑바로 덮여 나갑니다. 잘 한다 소리가 나올 법도 한데, 그런 소리는 없습니다. 



논 끝에서 기계 돌려서 방향을 돌릴 때마다, 비닐이 너불너불해지고, 잘 안 펴집니다. 기사가 따라다니면서 비닐을 다시 잡아줍니다.

= 이보소 이런 거 쓰는기 사람 편하자고 하는 건데. 뒤에서 누가 따라댕겨야 할 거 같으면, 할매 나오고 마누라 나오고 해야 하는데, 누가 쓰나. 못 쓴다고. 

= 저거 작은 바퀴도 비닐을 더 잘 눌러야 돼. 나중에 물 채우면 벙벙해져 가지고, 비닐 뜬다고.

이게 시연하는 자리라기보다는 어째 모니터링하는 자리가 되어갑니다. 회사 사람들도 말씀 하신대로 고치겠다는 이야기를 많이 합니다.


이앙기를 운전해서 논 저쪽까지 한번 덮고 오셔서는 또 간단하고, 단호하게 한 마디 하십니다.

(비닐을 자동으로 잘라주는 칼날을 두고) 이 칼 안 돼. 밭에서나 이런 거 쓰지. 논에서는 더 예민해야돼. 이거 갈아.

슬슬, 자리가 정리됩니다. 회사 사람들은 개선을 약속했고, 돈이며 기술이며 아직은 문제가 있어 보이긴 했어도, 자리에 나온 농민들은 이게 제대로 쓸 수 있게 나오기를 바라는 눈치인 듯했습니다. 

그래도 이곳 농민들은 직파를 하거나 새로운 농법을 하는 것에 대해서 무척 호의적이라는 느낌이었습니다. 사진에서 보이는 오른쪽 논도 무논에 곧바로 볍씨를 점파한 논입니다. 올해 제가 본 논 가운데 가장 상태가 좋은 축입니다. 쓰러진 것도 별로 없고, 빛깔도 좋구요. 
요즘 악양은 타작이 한창입니다만, 볏잎이 새파란 것이 아주 많습니다. 익었다고 하는 것도, 다른 때처럼 약간 붉은기가 돌면서 누런 것이 아니라, 푸른기가 살짝 도는 노란색입니다. 멀쩡한 곳이 별로 없지요. 그에 견주면 직파를 했다는 이곳 논들은 아주 좋아 보였습니다.
논에 직파를 하는 것은 다시 생각해 보겠지만, 아마 제가 멀칭을 하는 방법을 쓸 리는 없을 겁니다. 아무리 두어달만에 세균 따위가 먹어 치워서 스스로 분해가 되는 비닐이라고 해도, 논바닥을 저 꼴로 만들 수는 없지요. 약 안 치고, 벼가 튼튼하게 자라는 것이야 좋겠지만, 저래 놓으면 논바닥에 벼 말고 뭐 하나 살 수 있을까요. 저희 집만큼 작은 규모에서는 돈도 많이 들구요. 여하튼, 다른 거 다 괜찮아도 보기 싫어서 안 합니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남한에서 쉰 넘은 남정네들 가운데 멀쩡한 사람들은 여기에 제일로 많네 싶었습니다. 솔직히 어디서든 남자 어른들만 보여 있는 자리란, 쫌 궁상맞고, 재미없고, 허세나 있고, 그리고 '쓸 데' 없다는 느낌을 받을 때가 많았는데 말이지요. 남자 어른들만 모여 있는 자리에서, 이런 느낌이라니. 그것만으로도 놀라웠어요. 나오는 이야기를 듣고 있자면, 농민이 그동안 얼마나 당하고 살아왔나 싶은 것들도 많았습니다만, 활기 있고, 지적이고, 예리한 어르신네들었지요. 

자, 봄이네의 결론은 이런 겁니다. 농민을 상대로 장사할 때는 농사와 상관없는 것으로 할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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