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내 비가 오더니, 가뭄이 심해서, 다 말라 비틀어지는 가을이었습니다. 악양은 어디든 감나무가 줄줄이 늘어선 마을인데요, 옆집 아저씨가 지나는 말로 "감이 나무에 매달리가 곶감이 되겠네." 하실 만큼이었습니다. 해걸이에, 좋지 않은 날씨에, 감나무마다 감이 겨우 열댓개 달린 것이 많았는데, 잘 익어야 할 때에도 날씨가 나빴던 것이지요. 나락도 좋지 않았습니다. 다들 농사가 좋지 않긴 했습니다만, 봄이네는 쫌 유난. __; 올해 가을 유난히 콩이며 깻단 널어 놓은 것이 많습니다. 볕 잘드는 봄이네 집 담벼락에는 동네 사람들이 돌아가며 콩단과 깻단을 세워 말립니다. 아마도 작년 겨울 갑작스레 논에 감나무 심은 집이 많은 까닭일 겁니다. 그런 것이 아니어도, 부러 논에다가 콩 심은 집들도 많았고요. 건너건너..
땅콩을 거뒀습니다. 그래도 주말농장 따위까지 계산에 넣자면 7-8년쯤 밭에다 무언가를 심어왔던 셈인데, 땅콩은 처음입니다. 아직, 이르지 않을까 싶기는 했지만, 가을 농사를 제때 시작하지 못한데다가, 지금 밭 모양새도 엉망이라, 일단 심은 것들 다 거두었습니다. 처음 하는 작물이라, 자리도 잘못 잡아놔서 더 기다리기가 어려웠거든요. 살짝 풋것 냄새가 나는 것도 같습니다만, 삶은 땅콩 맛이 고소하고 부드럽습니다. 볶은 땅콩과 삶은 땅콩은 바싹 구운 삼겹살과 잘 익은 보쌈의 차이. 어릴 적 땅콩은 오로지 볶은 것만 있는 줄 알았다가 어른이 다 되어서야 삶은 땅콩을 처음 먹고는, 맨 처음 보쌈을 먹었을 때보다 더 넓은 세상을 만난 기분이 들었다지요. 이제는 나이 때문인지 모르겠지만, 쓸데없이 기름을 볶아 고소..
어디든 비 많이 왔다는 이야기입니다. 일요일 저녁에는 대략 서너 시간동안, 300mm가 훌쩍 넘는 비가 내렸습니다. 깊이가 1m가까이 되는 고무 다라이는 분명 비워져 있었으나, 하루밤새 물이 넘치도록 받아져 있습니다. 마을에서 가장 상습 침수가구였던 집이어서 동네 할매 할배들이 날 밝자 오셔서 괜찮냐 물으십니다. 다행히도 지난 공사 덕분에 동네 어르신들 짐작보다는 물난리가 덜 났습니다. 욕실 하수구에서 솟아난 물은 방으로 들지 않았고 살림채 안으로도 괜찮습니다. 뭐, 여튼 별일 아닌 집.인 셈입니다. 바로 집앞, 개울도 넘치고, 둑이 무너지고, 읍내 나가는 다리도 막혀 있구요. 마을에서 가장 큰 물난리는 방아간에 들어서, 쌀이며 나락이며 기계가 들어서 있는 방아간과 또 그 창고에는 지금도 물이 흥건합니다..
동동이가 태어나고 세이레가 지났을 때 끄적여 놓은 것에 아래와 같은 대목이 있다. 이제 두 아이의 아빠이군요. 혹시 걱정이라면? - 전쟁과 난리, 기근, 역병 같은 것들. 특별한 변화가 없다면 저와 같은 세대부터 겪게 되겠지요. 차라리 비디오나 pc게임 따위가 걱정이라면 좋을텐데요. 한동안 일본 소식에 온 마음이 꼼짝을 못 하였는데, 여전히 즐겨찾기 첫 칸에는 일본 뉴스를 모아놓은 페이지가 걸려있지만, 이제는 슬슬, 새로운 뉴스가 올라왔어도 제목만 훑고 지나가기도 한다. 석면과 폐암의 관계는 개인의 경험으로는 쉽게 알아내기 어렵다. 당장 내 몸에는 기침 한 조각 일으키지 않으니 바다 건너, 원자력 발전소 따위 무감해지는 것이야. 상황이 점점 안 좋아지는 것은 불을 보듯 분명한데도 말이다. 관서에 계시는 ..
다녀왔어요. 집안의 기념할 만한 때를 준비하야 아내가 따로 모아놓은 돈이 있었죠. ^^; 여행은 밤에 떠나는 배를 타고 시작되었습니다. 외할아버지와 외할머니, 저와 아내와 봄이. 첫날은 비가 왔습니다. 덕분에 따뜻한 노천탕에 몸을 담그고 비를 맞았지요. 둘째날은 맑고 따뜻합니다. 식구들끼리 거니는 것이어서,(그러고 보니 구성원이 할매, 할배와 임산부와 두돌 안된 아이와.) 그저 다닐 만큼 다닙니다. 하루종일 온 식구가 함께 걷고 이야기하고 그러니, 아무래도 가장 신난 건 아진이. 밥상은 이미 모든 일이 치뤄진 다음이라, 어수선하고 황량합니다만, 국수도 아주 맛있었고 또, 봄이가 앉아있는 의자도 마음에 들었어요. '식당 전체에 몇 개'가 아니라, 다다미 방에 올려진 밥상마다 하나씩 딸려있던 아기 의자. 자..
대파 한 단은 만원. 오이 두 개는 오천원. 배추 한 통은 칠천원. 상추 한 근은 만원. 시금치 한 움큼은 오천원. 무 한 개는 사천원. 11월에 다시 공사를 할 예정이라 자재도 부려야 하고, 작업도 해야 해서, 그냥 놀려두었던 마당 한 켠에 부랴부랴 모종도 심고, 씨도 뿌리고 했습니다. 뭐든 나는 만큼이라도 거둬서 먹자 했지요. 사진에 싹 난 것들이 제대로 자란다면(물론 그럴리는 없지만.) 대략 십만원쯤? 모종은 심은 지 며칠 되지 않아서 금세 가난한 사람들처럼. 그렇게 어린 것이 또 누군가 잎을 갉아먹어버렸습니다만, 이틀이 지난 오늘 아침에는 다시 멀쩡하게 자라고 있습니다. 담장에는 박이 자랍니다. 박나물은 노각 비슷하지만, 노각처럼 시큼한 맛은 없고, 담백하고 시원합니다. 씹을 때도 우무 비슷하게 ..